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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전부락의 차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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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전부락의 차문화
다전 (茶田) 조석현
삼국시대 때부터 차문화를 형성해 온 우리나라 차는 신하와 고려를 거쳐 어느 정도 성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억불정책에 따라 사원차가 쇠퇴함에 따라 거의 명맥이 끊기다시피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실로 2백년이나 기록에서 사라졌던 차가 19세기 초 다산(茶山), 초의(艸衣), 추사(秋史) 같은 다인에 의해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1940년 경 일본인인 가입(家入)이 전남지방의 전다(錢茶) 등을 조사한 책인‘조선의 차와 선’(번역본은 동명여중교장 최순자씨의 초안을 최계원 광주시립박물관장과 글쓴이의 교주(校註)로 1983년 발행)등 일본인에 의한 기록 이 있을 뿐 별다른 기록이 없던 차에 전남 보성 다전부락에 문인차(文人茶)를 엿볼 수 있는 귀한 기록이 있다.
글쓴이의 태생지이기도한 전남 보성군 득량면 송곡리 다전(茶田)부락 속칭 차밭밑[茶田下], 어린 시절 차밭밑이란 명칭에 의문을 품고 촌로에게 물으니 옛날에 차밭이 있었다 한다. 아버지께 차밭에 대해 물으니 마을 언덕 뒤에 차밭이 있었고 배가 아플 때는 그 차잎을 다려 마셨다 할 뿐 차를 마시는 것은 보지 못했다 한다. 차를 마시는 풍속은 사라지고 약용으로 명맥을 유지하다 그나마 사라지고 야생차밭은 대밭과 함께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증조부와 관련된 시문이 실려 있다고 건네 준 다잠유고(茶岑遺稿)를 보니 다잠정사(茶岑精舍)를 시인문객 들이 서로 교류를 하면서 차를 마시는 시가 있었다.
다잠(茶岑) 양덕환(梁德煥)(1846-1919)은 칠순(1916년경)에 다잠정사를 짓고 시인문객과 교유하였다.다잠정사 집 뒤엔 야생차가 대나무 사이에서 자라고 있었고 이를 다잠(茶岑) 다산(茶山) 다전(茶田) 다전동(茶田洞) 등으로 불렀다 한다.다잠의 아버지인 양식(梁植)(1815-1873)의 호가 다전(茶田) 자신은 다잠(茶岑)이라 했으니 차와 각별한 인연을 엿볼 수 있다.
1976년 발간된 다잠유고는 전은유고와 송담유고와 합본인데 전은(田隱)과 송담(松潭)은 다잠의 첫째와 셋째 아들이다. 전은 양회수(梁會水)는 홍승(洪承) 백승(百承) 두승(豆承) 지승(智承)의 네 아들을 두었고 송담 양회전(梁會전)은 만승(萬承) 천승(千承) 유승(유承)의 세 아들을 두었다.
다잠유고의 편집인은 송담의 장자(長子) 만승이고 발행인은 전은의 장손(長孫) 창열(昌烈)이다. 그리고 다잠의 둘째인 양회선(梁會宣)은 낙승(洛承) 길승(吉承) 봉승(鳳承) 완승(完承) 별승(別承) 근승(近承) 등 6남과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바로 글쓴이의 할머니이시다.
또한 효자로도 이름난 전은(다전부락 마을 입구에는 전은의 효자비가 있다)은 글쓴이의 증조부인 담은(澹隱) 조병진(曺秉鎭)과 교유하여 담은정운(澹隱亭韻)의 화답시와 담은정팔경시(澹隱亭八景詩)의 차운을 남긴다. 글쓴이와는 이런 인연을 가지고 있고 유승의 아들인 동학(東鶴)이와 완승의 아들인 동욱(東郁)이는 어릴 적 같이 자란 죽마고우로 초등학교 동창생이다.
다잠의 다음의 다잠정사운을 보면 불행히도 차를 직접 언급한 부분은 없다.
다잠정사운 茶岑精舍韻
칠순에 다행히 운 있어 七旬幸運築斯樓
이 정사 지으니
맑고 한가로움 얻어 占得淸閑永日遊
긴 나날 노니네
땅은 으슥하고 깊어 地僻爲嫌開洞口
마을 어귀 열기 꺼리고
난간 머리위엔 月明尤喜上欄頭
달밝아 더 기뻐라
새이엉도 다 못 얹어 茅茨未畢難經夏
여름 지나기 어렵고
토목공사 겨우 하니 土木재成已屬秋
이미 가을 왔구나
마음가짐과 지킴 戒爾持心同此柱
이 기둥같이 하고
대대로 집안 이름 드날려 家聲世世好風流
좋은 가풍 흐르고녀
그러나 다잠정사의 교유하던 문인들의 차생활은 10개의 차운 중 3번째로 쓴 옥전(玉田) 안규신(安圭臣)의 시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차밭아래 누각엔 茶烟細起篆山樓
차연기 가늘게 오르고
평지에 사는 신선 平地神仙課日遊
하루 일과는 노는 일이네
소동파 석가산 나무는 蘇門木假三峰頂
삼봉 정상에 있고
노동의 맑은 바람은 盧氏淸風七碗頭
일곱 찻잔 머리에 이네
벗과 바둑을 두며 碁朋對局同消夏
같이 여름을 지내고
서재에서 연려실기술을 보고 書室燃藜獨送秋
홀로 가을을 보내네
선조의 충성과 공훈은 先世忠勳來世慶
자손의 기쁨이요
네모진 연못에 출렁이는 물은 方塘活水有源流
흘러나오는 곳이 있네
소동파의 석가산 나무가 삼봉에 있다와 노동 칠완은 서로 대구가 되는데, 소동파는 당송 팔대가의 한사람인 대문장가요 노동은 유명한 다인이다. 석가산은 돌로 쌓은 가짜 산으로 중국의 정원양식 중에 하나다. 주로 세봉우리를 만들었으며 연못 한가운데 섬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노동 칠완은 당나라 시인 옥천자가 맹간의로부터 차를 받고 지은 칠완의 시를 가리킨다. 칠완(七碗)은 찻잔인데 차 마시는 일의 대명사로도 쓰인다.
4번째 차운으로 쓴 안규문(安圭文)의 시에는
칠완 잠시 쉬고 번뇌 떨쳐내니 七碗재休塵念掃
봉래 신선과 함께 하는 것 같네 蓬萊仙伴卽其流
라고 하여 칠완이 차마시는 일로 쓰임을 보여준다
7번째 차운인 죽탄(竹灘) 황재묵(黃在默)의 시를 보면 누각 주위에 차나무가 있었고 차를 세 때 올려 마신다고 했으니 차를 마시는 일이 상당히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한 작은 누각에 嘉木叢叢一小樓
아름다운 차나무는 빽빽하고
주인과 손님 함께 어울려 主賓結社足優遊
즐겁게 노니네
반평생 맑게 닦아 半世淸修宜白面
벼슬없이 지내고
세 때 차를 다려 三時煎供走蒼頭
올려 마시곤 하네
붉게 달아오른 화롯가에서 紫汞爐邊消歲月
세월을 보내고
국화 피온 책상 머리에서 黃花案上講春秋
춘추를 가르치네
그대와 나 사이 숨어 흐르는 如何分得淸風味
맑은 멋스러움
어찌 나눠 가지리 也與君吾作隱流
가목(嘉木)은 차나무의 다른 이름이다. 조선 후기 차인으로 유명한 초의선사는 우리 차를 노래한 ‘동다송(東茶頌)’의 제1송에서 ‘후황이 아름다운 나무를 귤의 덕과 짝 지으시니’(后皇嘉樹配橘德) 라고 하고 있다.
교유하는 그들 스스로를 다선(茶仙)이라고까지 했으니 6번째 차운에서 정의현(鄭宜鉉)은
속세에서 벗어난 높은 누각에 高出人間第一樓
다선들이 이따금 서로 좋아 노니네 茶仙往往好相遊
라고 노래한다.
죽탄의 시에서 ‘작은 누각에 차나무가 빽빽하다’고 했고 8번째 차운을 쓴 선병훈(宣炳勳)은 ‘한 누각 밭에 차꽃이 가득하고’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다잠은 집 뒤쪽 야산인 차 언덕 뿐만 아니라 다잠정사 주변에도 차를 심어 차밭을 만들었던 것 같다. 지금은 다잠정사 주변에 차밭은 보기가 힘들고 차를 마시는 풍속도 끊기었다.
다도가 다시 부활되는 이 때에 옛 선비들의 차문화를 다시 발굴하여 음미하고 여유의 미학과 정신을 이어 받고 오늘에 되살리는 일환으로 다전부락의 차문화를 그들이 남긴 차시를 통해 살펴 보았다.
[ 다전의 야생차 ] 너무도 건강한 모습 - 06년 추석에 못등 안집 뒤안에서 찍음
다전 (茶田) 조석현
삼국시대 때부터 차문화를 형성해 온 우리나라 차는 신하와 고려를 거쳐 어느 정도 성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억불정책에 따라 사원차가 쇠퇴함에 따라 거의 명맥이 끊기다시피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실로 2백년이나 기록에서 사라졌던 차가 19세기 초 다산(茶山), 초의(艸衣), 추사(秋史) 같은 다인에 의해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1940년 경 일본인인 가입(家入)이 전남지방의 전다(錢茶) 등을 조사한 책인‘조선의 차와 선’(번역본은 동명여중교장 최순자씨의 초안을 최계원 광주시립박물관장과 글쓴이의 교주(校註)로 1983년 발행)등 일본인에 의한 기록 이 있을 뿐 별다른 기록이 없던 차에 전남 보성 다전부락에 문인차(文人茶)를 엿볼 수 있는 귀한 기록이 있다.
글쓴이의 태생지이기도한 전남 보성군 득량면 송곡리 다전(茶田)부락 속칭 차밭밑[茶田下], 어린 시절 차밭밑이란 명칭에 의문을 품고 촌로에게 물으니 옛날에 차밭이 있었다 한다. 아버지께 차밭에 대해 물으니 마을 언덕 뒤에 차밭이 있었고 배가 아플 때는 그 차잎을 다려 마셨다 할 뿐 차를 마시는 것은 보지 못했다 한다. 차를 마시는 풍속은 사라지고 약용으로 명맥을 유지하다 그나마 사라지고 야생차밭은 대밭과 함께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증조부와 관련된 시문이 실려 있다고 건네 준 다잠유고(茶岑遺稿)를 보니 다잠정사(茶岑精舍)를 시인문객 들이 서로 교류를 하면서 차를 마시는 시가 있었다.
다잠(茶岑) 양덕환(梁德煥)(1846-1919)은 칠순(1916년경)에 다잠정사를 짓고 시인문객과 교유하였다.다잠정사 집 뒤엔 야생차가 대나무 사이에서 자라고 있었고 이를 다잠(茶岑) 다산(茶山) 다전(茶田) 다전동(茶田洞) 등으로 불렀다 한다.다잠의 아버지인 양식(梁植)(1815-1873)의 호가 다전(茶田) 자신은 다잠(茶岑)이라 했으니 차와 각별한 인연을 엿볼 수 있다.
1976년 발간된 다잠유고는 전은유고와 송담유고와 합본인데 전은(田隱)과 송담(松潭)은 다잠의 첫째와 셋째 아들이다. 전은 양회수(梁會水)는 홍승(洪承) 백승(百承) 두승(豆承) 지승(智承)의 네 아들을 두었고 송담 양회전(梁會전)은 만승(萬承) 천승(千承) 유승(유承)의 세 아들을 두었다.
다잠유고의 편집인은 송담의 장자(長子) 만승이고 발행인은 전은의 장손(長孫) 창열(昌烈)이다. 그리고 다잠의 둘째인 양회선(梁會宣)은 낙승(洛承) 길승(吉承) 봉승(鳳承) 완승(完承) 별승(別承) 근승(近承) 등 6남과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바로 글쓴이의 할머니이시다.
또한 효자로도 이름난 전은(다전부락 마을 입구에는 전은의 효자비가 있다)은 글쓴이의 증조부인 담은(澹隱) 조병진(曺秉鎭)과 교유하여 담은정운(澹隱亭韻)의 화답시와 담은정팔경시(澹隱亭八景詩)의 차운을 남긴다. 글쓴이와는 이런 인연을 가지고 있고 유승의 아들인 동학(東鶴)이와 완승의 아들인 동욱(東郁)이는 어릴 적 같이 자란 죽마고우로 초등학교 동창생이다.
다잠의 다음의 다잠정사운을 보면 불행히도 차를 직접 언급한 부분은 없다.
다잠정사운 茶岑精舍韻
칠순에 다행히 운 있어 七旬幸運築斯樓
이 정사 지으니
맑고 한가로움 얻어 占得淸閑永日遊
긴 나날 노니네
땅은 으슥하고 깊어 地僻爲嫌開洞口
마을 어귀 열기 꺼리고
난간 머리위엔 月明尤喜上欄頭
달밝아 더 기뻐라
새이엉도 다 못 얹어 茅茨未畢難經夏
여름 지나기 어렵고
토목공사 겨우 하니 土木재成已屬秋
이미 가을 왔구나
마음가짐과 지킴 戒爾持心同此柱
이 기둥같이 하고
대대로 집안 이름 드날려 家聲世世好風流
좋은 가풍 흐르고녀
그러나 다잠정사의 교유하던 문인들의 차생활은 10개의 차운 중 3번째로 쓴 옥전(玉田) 안규신(安圭臣)의 시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차밭아래 누각엔 茶烟細起篆山樓
차연기 가늘게 오르고
평지에 사는 신선 平地神仙課日遊
하루 일과는 노는 일이네
소동파 석가산 나무는 蘇門木假三峰頂
삼봉 정상에 있고
노동의 맑은 바람은 盧氏淸風七碗頭
일곱 찻잔 머리에 이네
벗과 바둑을 두며 碁朋對局同消夏
같이 여름을 지내고
서재에서 연려실기술을 보고 書室燃藜獨送秋
홀로 가을을 보내네
선조의 충성과 공훈은 先世忠勳來世慶
자손의 기쁨이요
네모진 연못에 출렁이는 물은 方塘活水有源流
흘러나오는 곳이 있네
소동파의 석가산 나무가 삼봉에 있다와 노동 칠완은 서로 대구가 되는데, 소동파는 당송 팔대가의 한사람인 대문장가요 노동은 유명한 다인이다. 석가산은 돌로 쌓은 가짜 산으로 중국의 정원양식 중에 하나다. 주로 세봉우리를 만들었으며 연못 한가운데 섬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노동 칠완은 당나라 시인 옥천자가 맹간의로부터 차를 받고 지은 칠완의 시를 가리킨다. 칠완(七碗)은 찻잔인데 차 마시는 일의 대명사로도 쓰인다.
4번째 차운으로 쓴 안규문(安圭文)의 시에는
칠완 잠시 쉬고 번뇌 떨쳐내니 七碗재休塵念掃
봉래 신선과 함께 하는 것 같네 蓬萊仙伴卽其流
라고 하여 칠완이 차마시는 일로 쓰임을 보여준다
7번째 차운인 죽탄(竹灘) 황재묵(黃在默)의 시를 보면 누각 주위에 차나무가 있었고 차를 세 때 올려 마신다고 했으니 차를 마시는 일이 상당히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한 작은 누각에 嘉木叢叢一小樓
아름다운 차나무는 빽빽하고
주인과 손님 함께 어울려 主賓結社足優遊
즐겁게 노니네
반평생 맑게 닦아 半世淸修宜白面
벼슬없이 지내고
세 때 차를 다려 三時煎供走蒼頭
올려 마시곤 하네
붉게 달아오른 화롯가에서 紫汞爐邊消歲月
세월을 보내고
국화 피온 책상 머리에서 黃花案上講春秋
춘추를 가르치네
그대와 나 사이 숨어 흐르는 如何分得淸風味
맑은 멋스러움
어찌 나눠 가지리 也與君吾作隱流
가목(嘉木)은 차나무의 다른 이름이다. 조선 후기 차인으로 유명한 초의선사는 우리 차를 노래한 ‘동다송(東茶頌)’의 제1송에서 ‘후황이 아름다운 나무를 귤의 덕과 짝 지으시니’(后皇嘉樹配橘德) 라고 하고 있다.
교유하는 그들 스스로를 다선(茶仙)이라고까지 했으니 6번째 차운에서 정의현(鄭宜鉉)은
속세에서 벗어난 높은 누각에 高出人間第一樓
다선들이 이따금 서로 좋아 노니네 茶仙往往好相遊
라고 노래한다.
죽탄의 시에서 ‘작은 누각에 차나무가 빽빽하다’고 했고 8번째 차운을 쓴 선병훈(宣炳勳)은 ‘한 누각 밭에 차꽃이 가득하고’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다잠은 집 뒤쪽 야산인 차 언덕 뿐만 아니라 다잠정사 주변에도 차를 심어 차밭을 만들었던 것 같다. 지금은 다잠정사 주변에 차밭은 보기가 힘들고 차를 마시는 풍속도 끊기었다.
다도가 다시 부활되는 이 때에 옛 선비들의 차문화를 다시 발굴하여 음미하고 여유의 미학과 정신을 이어 받고 오늘에 되살리는 일환으로 다전부락의 차문화를 그들이 남긴 차시를 통해 살펴 보았다.
[ 다전의 야생차 ] 너무도 건강한 모습 - 06년 추석에 못등 안집 뒤안에서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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