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전통차 농업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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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농업유산마을 / 보성 영천마을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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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083회 작성일 21-03-09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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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 유산마을 - 영천마을 유래

 

보성군 회천면 영천마을은 조선 세종때 신안 (朱) 주씨가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옛날 선비들이 낙향하여 마을에 정착하면서 흑운(黑雲)다리에서 놀았는 데 이곳의 폭포형상이

괘주(掛珠)와 같고 운기(雲氣)하는 듯한 신비령이 있어서 처음에는 빼어날 영(潁) 내 천(川)을 써서

영천(潁川)이라 부르다가 후에는 이곳의 물소리를 들으면 정신이 맑아진다고 하여

들을 영(聆) 내 천(川)자를 써서 영천(聆川)이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영천(永川)이라고 했으나 광복 후에 다시 영천(聆川)이라 했다

영천 계천(溪川)명이 영천(永川)천이며 다리이름도 영천교((永川橋)이다.

마을 이름은 영천(永川), 영촌(聆村) ,영천(聆川), 원영천(元聆川)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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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때 회천면 영천마을 북쪽 웅치면에서 흘러내려오는 계곡물은 수량이 많아

소수력 발전소가 일찍 들어섰다.

타지역보다 전기가 일찍 들어온 허공달(흑운다리)의 작은 보를 마을 사람들은 번개집등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이곳은 원시림으로 바뀌고 사람들이 겨우 비집고

지나칠 정도의 오솔길만 남아있다.

 

그 시절을 증명하듯이 뚝 잘려나간 시멘트 구조물이 바위사이에 걸쳐져 있다.

지친 세월탓에 마석도 많이 되고 이끼가 많은 걸로 보아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그곳에서 약간 우측에서 산 위쪽을 보면 씨미골(쉼바탕-쉼골)이 보이고 그 산 주변에는 다랭이가 많다.

가파른 계곡에 질서없이 늘부러진 조그만 바위사이로 물줄기가 지금도 졸졸 흐르고 있다.

한사람이 겨우 다닐수 있는 비좁고 험한 길을 소몰고 나무 한짐 해오던 그길이란다.

어쩌면 배고프고 힘들었지만 그마져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살았던

이곳 주민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웅치를 넘어가는 경계에 못 미치면 도둑골(도적골,도적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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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음정에서 약 100m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영천정(潁川亭)이 있었는 데

동곡(桐谷) 박형주가 건립하였으며 이후 조선이 일제에 피침당하자 문백천(文 柏泉),

주재여(朱在汝) 등이 우국을 논하면서 이 곳에서 비련을 달랜 곳이다.

 

영천정(潁川亭)이 세워져 있던 곳으로 추정되며 큰바위밑에는

객성박씨지산(客城朴氏之山)이라는 석각이 새겨져 있다.

좌측편에 계곡이 흐르고 있으며 당시 박형주는

이곳의 빼어난 절경을 중국 하남의 영천강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신미년(辛未年)에 조각한 것으로 봐서 영천정(潁川亭)을 세운 시기는 1931년으로 추정한다.

그후 서편제에서 보성소리가 득음정이라는 새로운 정자가 세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영천(聆川)이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다.

 

영천(潁川) 지명은 동곡 박형주가 태평성대를 이루던 요순시대를 본따 지은 것이다.

영천(潁川)을 직역하면 단순한 빼어난 하천(江)이지만 이지명을 이해하기에는

좀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중국의 드넓은 대륙에 우리나라의 지명과 문화가 비슷한 곳이 많으며

영천 또한 중국의 지명에서 따온 것임을 알수 가 있다.

 

영천(潁川)강은 중국 하남성의 절경으로 알려져 있다.

동곡 박형주는 허유(許由)와 소부(巢父)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영천을 떠올리며

일제의 가슴아픈 사연을 안은채

기꺼이 정자의 이름을 영천정(潁川亭)으로 지었던 것이다.

 

 

부족국가로 형성된 중국의 요순시대는 백성들이 군주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무치(無治)라고 할 정도의 태평성대로 삶이 풍요로왔다.

 

요임금시절 왕위계승은 선양(禪讓)이라는 정권이양으로 이어졌는데

선양은 지혜와 도덕을 갖춘 사람을 왕으로 추대하는 방식이다.

 

그리하여 요임금은 천하를 돌아다니다 덕이 충만한

허유(許由)라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천자를 삼으려했다.

허유(許由)는 이 말을 듣고 기산으로 몸을 숨겼으나 또다시 찾아와 재차 설득하자

곧바로 영천(潁川)으로 달려가 흐르는 맑은 물에 양쪽 귀를 씻었다.

 

소의 물을 먹이려던 소부가 마침 그곳을 지나다가 연유를 물으니

요임금이 나라를 맡아달라는 더러운 소리를 들어 귀를 씻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소부는 더러운 말을 듣고 귀를 씻은 물을 어찌 소에게 물을 먹일 수 있겠냐며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소에게 물을 먹였다고 전한다,

 

이는 바로 당시의 태평성세를 칭송하는 설화로

중국인의 이상적인 정치와 민생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결국 요임금은 순이라는 사람이 효성과 인간적 덕성을 지닌 인물임을 판단하고

왕의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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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재고개에서 영천2구 쪽으로 내려오면 영천제라는 풍광 좋은 호수가 보인다.

영천제(聆川堤)는 1980년~1984년에 완공하였으며

구전에 의하면 영천방죽에 은붕어가 논다는 노랫가락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비가온후 영천호수는 주변 차밭을 안개로 뒤덮는 장관을 연출하여

이곳을 다녀간 관광객들은 숨은 진주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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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樑洞)마을은 1500년 경에 영천에 정착한 신안 주(朱)씨 일부가 농경지를 따라

이곳으로 분가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지명은 고승(高僧)이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 모양이 제비집 같이 생겼다하여

연소(燕巢)라고 부르다가 언제부터인가

이곳이 봇재(褓峙)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들보 양(樑) 자를 써서 양동(樑洞)이라 전해진다.

 

 

흑운(黑雲)다리를 주민들은 이렇게도 부른다.

허공달(虛空達) 텅빈공중에 이르다.

허궁달(虛宮達) 텅빈궁에 이르다

허궁달(虛窮達) 허망하고 궁함에 이르다.

영천마을 팔순이 넘은 할머니께서는 그저 소리나는 대로 홍달이라고도 부른다.

 

쉼바탕은 비석골 건너쪽에 젖꼭지 모양으로 봇짐 장수들이 쉬어가던 곳이다.

곰방대에 연기를 빨아내며 엽전을 헤아리던 곳이기도 하다.

먹을 것 부족하던 그 시절 칡뿌리 입에 물고 선녀탕에서 몸을 적시던 곳이다.

 

산짐승들이 떼를 지어 다니던 곳에 이름모를 들꽃들이 벌나비를 희롱하며

이따금 인적에 놀란 꿩이 날개를 털며 날아다니고

비석골 바위틈에 홀로핀 할미꽃이 아름다운 자연의 허공달이다.

허공달 어귀에 우뚝선 바위는 비바람과 세월의 흔적은 균열과 이끼로 나이를 가늠한다.

 

영천의 젖줄인 거름보는 여인네들의 목욕터였다.

어린아이들이 고무신짝을 움켜쥐고 피라미떼와 민물고둥을 잡던 전설이 담긴 곳이다.

봇재 고개는 아흔아홉구비의 수많은 사연을 담고 봄이면 복사꽃 살구꽃이 화사한 꽃동산을 이루고

뒷산에는 참취나물, 고사리등 산채향기가 가득하다.

가지렴의 중턱에는 창출,지내초,한가구,우슬, 엉(낭떠러지) 밑에는 오미자, 엄나무. 오가피,

보리똥나무, 석장풀, 두릅나무가 자생하였다.

 

영촌(聆村)은 산골이어서 멧돼지 노루 꿩 산비둘기, 오소리, 쌀가지, 고라니 등 산짐승이 많았다.

밤에는 멧돼지가 한적한 감자밭을 골라 여기저기 헤집고 다녀 피해가 극심하였다.

허구렁을 파서 멧돼지를 포획하던 날이면 마을 잔치도 마련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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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마을의 인심도 예전같지 않았고 마을의 기운도 차츰 쇠퇴해져 갔다.

6,7십여가구의 집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30여가구만 홀로이 마을을 지켜나갔다.

탯자리를 떠나지 못한 선량한 주민들은 옛추억만 간직한채 묵묵히 농사일에 전념하였다.

 

영천마을에는 수령오백여년이 된 느티나무가 있었다.

마을의 당산이고 수호신인 느티나무는 웅장한 자태를 뽐냈다.

둘레 4미터가 넘고 높이 삼사십미터정도로 연리지 상태로 몸통이 세그루가 합쳐져 있다.

방장산 오백몇십여년을 지켜오던 마을의 수호신이던 느티나무가 수장되기전

마을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참히 잘려나가면서 .웅.하는 곡소리를 내었다고 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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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내린 겨울 차밭▶

 

보성의 차는 약 830여년전 인도에 수학하러 갔던 승려들이 처음 들여왔다는 설이 있으며,

대한다원과 양동 숨은 밭골 주변에 고려시대 창건한 흑운사라는 절 부근에

차나무가 자생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하지만 지리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우수한 보성 주변 야산에는 아직도 야생차밭이 다수 현존하고 있다.

 

보성은 대륙성기후와 온화한 해양성 기후가 교차되는 지역으로 충분한

강우량과 배수가 용이하며 안개가 많이 끼어 차나무의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하며 환경적으로 차재배의 최적지로 평가 받고 있다.

 

보성의 차밭은 백제 시대부터 귀족과 사원 중심으로 차문화가 융성했는 데

고려시대에는 다촌(茶村), 다소(茶所)가 설치되어 공차를 실시하였다고 전해집니다.

 

 

현재 보성 대원사와 다전마을, 그리고 몽중산 다원에는 수백년된 차나무가

보성차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일제 침략시절 야산을 이용한 차밭이 본격적으로 조성되었지만

해방 후 일본인이 본국으로 돌아간 후 1969년 정부의 농어민 소득증대 사업으로

활성산 일대에 20헥타에 경작한 것을 시작으로 국내 최대의 차산지인

보성의 계단식 차밭이 조성되었다.


 

비가 내린 후 영천 호수 주변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차밭을 뒤덮는 안개는

때론 용이 승천하는 듯한 장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신농이 노래하던 예전부터 차의 적기였기에 자연환경과 잘 어우러진 계단식 차밭이

지금까지 우리의 소중한 농업 유산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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