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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보성,차밭밑의 차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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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666회 작성일 21-03-0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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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차밭밑의 차문화

 

 

여여다전 조석현(如如茶田 曺錫鉉), 2009

 

 

 

1. 서(序) : 한국 자생차(自生茶)의 메카, 보성

 

봄빛이 우러나오는 녹색의 차밭에 운무 낀 차밭의 전경. 자연이 우리 인간에게 준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선물이다. 봇재의 다랑이 차밭 이랑이 빚어내는 곡선은 보성 차밭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다. 그래서 보성 차밭을 보기 위해서 전국 각지에서 연 수백만의 관광객이 몰려오고 있다. ‘가보고 싶은 곳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보성 지역은 재배 차밭과 차의 관광으로 널리 알려졌다. 국내 야생차가 가장 많이 분포된 지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제도 야생차가 가장 활발히 자란 보성을 차의 재배적지로 선정하였던 것이다. 최근 차의 재배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자생차가 가장 많은, 명실공이 차의 메카인 것이다.

 

경북대 김주희 박사는 “국내 야생차 분포지 총 305개소 중 235개소가 전남 지역에 분포되어 있고 한국차 자생 및 발생 중심지는 보성읍 보성강 상류지역”이라고 ‘다도’(2001.8월호)에 게재한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보성군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보성군 12개 읍, 면에 무려 101곳의 자생차가 자란다 한다. 전국 야생차 중 전남이 77%를 차지한다. 또 보성은 전남의 43%, 전국의 33%를 차지한다. 현재 보성이 전국 차 생산의 40%를 담당함이 어찌 우연이랴? 역사적으로도 보성은 차의 본향(本鄕)임에 틀림없다.

 

백제 고찰 대원사 주변에 현재 3ha가 넘는 야생 차밭이 있고 징광사(澄光寺)터에 야생 차밭이 남아 있다. 복내면 당촌, 조성면 귀산, 보성읍 자원사지 등에 야생차가 있다. 차()자가 들어가는 지명으로 유명한 득량면 다전(茶田)마을[차밭밑]에도 자생차가 있다.(본 고에서 자세히 다루려 한다.)

 

또 차밭밑과 그리 멀지않은 겸백면 용산1리에 다동(茶洞)마을이 있다. 보성군문화원 자료에 따르면 광산김씨 김모(金冒)가 이 마을에 은거할 당시(1455년) 마을 뒤에 차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다 한다. 당시 “차밭등”이라 불렀는데 일제시대에 “다동(茶洞)”으로 개명한 것이다. 지금도 차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또 조성면 봉능1리 “청능(靑陵)”은 마을 뒷산에 차나무를 재배해 항시 푸른 능선의 차밭이 있어 얻은 이름이다.

 

웅치면에 고려 중엽부터 조선 초기까지 차를 공물(貢物)로 바치는 웅점다소(熊點茶所), 회천면에 갈평다소(乫坪茶所)가 설치 운영되었다한다. 문헌상으로도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와 1741년 <보성군지(寶城郡誌)>등에 보성차의 우수성을 밝힌 대목이 있다.

 

본 고는 이런 환경을 지닌 보성에서 득량면 송곡리 차밭밑의 자생차와 인문사회적 배경과 문인차(文人茶)로 꽃 피운 차문화를 살펴보려 한다.

 

 

2. 차밭밑이 속했던 「박실」의 지명고(地名考)

 

차밭밑은 박실 부락에서 분리되었고 원 박실은 ‘큰 박실’, 차밭밑은 ‘작은 박실’이라고도 불린다. 박실은 ‘보성군 3대 명당’ 중 한 곳으로 알려질 만큼 마을 터가 좋다 한다. 그럼 박실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어떻게 될까? 한자로는 박곡(朴谷), 박곡(亳谷)이라 한다. 우리말로는 ‘박실’이라 부른다. ‘-실’은 마을 이름에 붙이는 이름이라 ‘-골’과 뜻 차이는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문제는 “박”의 뜻이나 유래다. 보성군에서 밝힌 마을유래 자료는 ‘마을 터가 좋다’는 뜻에서 한자로 ‘박’()이라 했다 한다. 그러나 한자의 박()자가 과연 마을 터가 좋다는 뜻이 있는 지? 의문이다.

 

박()자는 원래 후박(厚朴)나무를 뜻한다. 나무껍질이 자연 그대로 갈라지니 ‘순박(淳朴)하다’의 뜻이다. 후박나무나 팽나무가 흔하지 않는 박실로 보면 이 유래는 가능성이 적어 보인다.

 

다음은 성씨인 “박()씨가 사는 마을”의 뜻으로 보는 방향이다. 보성군이 밝힌 마을 유래에서는 박실은 고려말엽 공민왕 원년 1352년 창녕 조()씨가 정착하여 마을이 이루어졌다 한다. 그런데 선친 말씀에 의하면 그 이전에는 박()씨가 자작촌을 이루고 살았다 한다.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혹 그래서 ‘박실’이라 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창녕 조씨 이전에 박씨가 먼저 정착함으로써 “박씨 마을”로 불리워진 것이 아닌가 하는.

 

주민의 성씨를 마을 이름으로 한 예는 보성군에도 조성면 대곡리 중촌(中村)을 들 수 있다. 중촌은 원래 우리말 ‘한실’(큰 골짜기가 있어)이었고, 그 이전에는 ‘고조리’(고씨와 조씨가 살아)로 불리웠다 한다. 조성면 봉능1리 ‘강가배미’도 진주 강씨가 살아 부른 이름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낳고 있다.

 

지금까지도 집성촌의 성격이 강한 박실의 특성을 보면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송곡리에서도 마을 터가 좋아 서로 좋은 터를 차지하려 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박실의 하나였던 차밭밑의 경우 거의 양씨들만 살고 있다. 현재도 차밭밑 양반님네는 아무리 쇠락해 땅을 팔아도 타성바지에게는 팔지 않는다.

 

양씨 세도로 땅을 빼앗을 사례를 들어보자. 선친의 증언이다. 율어(栗於)로 이사 가 살던 저의 증조 담은공(澹隱公) 조병진(曺秉鎭 : 1877.5.23~1945.12.15). 송사(訟事)로 돈이 급해 율어까지 가지 못하고 박실에 들렸다. 양씨에게 땅문서를 맡기고 돈을 빌려 쓴다. 곧 돈을 마련해 가지고 가서 땅문서를 돌려 달라한다. 그런데 양씨는 세도를 부리며 “언제까지 조씨 땅만 될꺼냐?”며 땅문서를 돌려주지 않았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국사봉 아래 양지바른 남향의 마을 「가신굴, 텃골, 박실, 차밭밑」을 아우르는 송곡리 박실 주변을 보자. 텃골의 북쪽인 가신굴[可信]에는 1543년 제주 양씨가 정착한다. 가신골은 거짓을 모르고 이웃끼리 상부상조를 잘한다 해서 이웃 주민들이 붙여준 이름이라 한다.

 

박실의 북쪽에 자리잡은 텃골은 한자로는 기동(基洞)이라 부른다. 묘자리터가 좋다해서 텃골이라 한다. 풍수지리상 박실이 양택(陽宅)인 집자리가 좋다면 텃골은 음택(陰宅)인 묘자리가 좋다는 것이다. 경기도에서는 “살아 진천, 죽어 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이란 말이 있다. 보성에서는 “살아 박실, 죽어 텃골”[生居亳谷, 死居基洞]인가? 텃골은 1917년 득량면으로 편입되기 전 송곡면(松谷面)의 행정 중심지로 번창했으나 지금은 박실보다 작다. 박실은 득량면 면소재지였다가 1945년에 작천역(雀川驛 현 득량역)이 있는 오봉리로 면사무소가 옮겨진다.

 

3. 차밭밑의 유래(由來)와 주민들

 

박실과 붙은 박실의 남쪽 차밭밑에 사는 사람들. 그들은 ‘다전(茶田)’이라는 한자말보다는 “차밭밑”이라고 우리말로 부른다. 한자 쓰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이 우리말 ‘차밭밑’을 다시 ‘다전하(茶田下)’로 썼다. 어릴 적에도 ‘다전하(茶田下)’로 쓰인 편지를 많이 보아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왜 ‘차밭밑’이라 부르는 지 매우 궁금해 마을 어른들께 물어 보았다. “차밭이 있고 그 밑에 마을이 있어 그렇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당시엔 차가 무엇인 지도 잘 몰랐고 차밭을 확인해 보지 못했었다.

 

차밭밑은 원래 박실의 한 지역이었다. 번창하여 1964년 행정구역이 분할되어 다전(茶田)부락으로 독립했다. 그러나 일찍이 그런 이름을 사용했다. 양식(梁植 : 1815~1873)은 그 호를 '다전(茶田)'이라 했다. 또 다잠의 아들 전은(田隱) 양회수(梁會水 : 1876~1958.2.13)의 전은유고(田隱遺稿)에도 ‘다전(茶田)’은 기록된다.

 

창녕 조씨가 먼저 1352년 박실에 정착하였고 1543년은 텃골에도 정착한다. 이는 창녕 조씨는 북진(北進)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주 양씨는 1543년 가신굴과 텃골에 정착한다. 그리고 이어서 창녕 조씨가 정착한 박실에 정착한다. 정유재란(1597년)시에도 이순신 장군이 박곡의 양산원(梁山沅)[족보에는 양산항(梁山杭)]의 집에 이른 것으로 나온다. 이것으로 보면 적어도 양씨는 가신굴과 텃골에 정착한 즈음 박실에도 정착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심지 박실을 차지한 양씨는 점점 세력이 불어나 남진하여 차밭밑에 가구수를 늘린다. 곧 남진(南進)한다. 텃골은 조씨와 양씨가 동시에 정착한데 비해 박실은 먼저 조씨가 정착하나 점차 양씨로 바뀌지 않았나 한다.

 

조씨가 박실 근처에서 살았던 사례는 글쓴이의 집안을 살펴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저의 12대조 조흥의(曺興義 : 1579.8.7~1643.11.4)가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의 손자 영해도호부사(寧海都護府使) 양산항[난중일기에서는 양산원]의 딸과 결혼한다. 이래 그의 자손들의 묘가 송곡면 고제동(高帝洞), 기동(基洞 : 텃골) 등에 위치한다. 이렇게 조씨가 박실 부근에 살았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글쓴이의 증조부 담은공(澹隱公) 조병진(曺秉鎭)이 남긴 시집 담은정시집(澹隱亭詩集)을 보자. 죽산 안규화(竹山 安圭鏵)는 ‘박실에서 여러 세대를 거치며 살다 (담은공의) 아버지 할아버지 대에서 다시 동쪽 율어 존제산 밑 오루굴에 다시 이사 왔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텃골(박실 북쪽) 득량초등량초교 앞에는 자그마한 동산[옥산등(玉山嶝)]에 지금도 글쓴이의 8대조 조명우(曺命宇)의 묘소가 있다. 7대조 조윤강(曺允綱 : ~1846.5.12)의 묘도 가신굴 위쪽(북) 고제동(高帝洞)에 있었다.

 

저의 14대조 조대관[曺大觀 : 창녕조씨(昌寧曺氏) 부제학파(副提學派) 보성 입향조(入鄕祖)]이 1586년 보성군 대곡면으로 오고 유택(幽宅)은 봉두산(鳳頭山)아래 명당인 반룡(盤龍)에 마련된다.(1615.7.20) 이후 창녕 조씨들이 그 아래에 모여 살게 된다. 그러다 현손(玄孫)인 11대조 통덕랑(通德郞) 조익필(曺益弼 : 1616.12.18~1674.11.12)은 어머니의 마을 박실로 온다. 7대조 조윤강(曺允綱 : ~1846.5.12)까지 5대에 걸쳐 산다. 묘의 위치 등으로 보면 텃골이나 그 북쪽마을에서 살았던 것 같다.

 

6대조 조응진(曺膺振 : 1792.4.22~1852.12.23)은 보성군 율어(栗於)로 이사간다. 5대에 걸쳐 살다가 선친 경파(炅坡) 조규호(曺圭浩 : 1933.2.23~2008.4.14)가 1958년 다시 차밭밑으로 돌아오게 된다. 11대조가 어머니의 마을 근처인 박실 부근으로 이사왔다. 선친도 글쓴이를 낳은 뒤 어머니[다잠 양덕환의 손자인 양승남(梁承男 : 1904.11.16~1944.8.25)]의 마을 다전으로 이사 온다. 이렇게 박실은 대대로 우리 조상의 외가 마을이었다 본가 마을이 되었다.

 

4. ‘차밭밑’의 차나무

 

그러면 차밭밑 차밭의 차나무는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가? 지금도 누구도 가꾸지 않고 야생 그대로다. 차밭밑 지역에 주민이 정착하여 산 것의 기록은 앞에서 살폈듯 1352년 조씨가 정착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구전(口傳)으로는 박씨가 먼저 정착했다한다. 그래서 박실(박씨들의 마을)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가능성이 제일 크다. 크게 박씨, 조씨를 거쳐 현재 양씨들이 대부분 거주하나 차는 언제부터 심어졌는 지 또는 언제부터 있었는 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인근의 겸백면 “차밭등”의 자생차가 1455년 이미 있었다. 기록이 그러면 ‘차밭밑’의 차도 적어도 1352년 조씨 정착 시점에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박실 이름을 얻듯이 박씨가 정착할 즈음부터 혹 있지 않았을까? 조씨 이전은 구전(口傳)이라 연대가 불확실하다. 확실한 문헌 근거가 나오기를 바란다. 조상들의 차에 대한 기록이 문집 등에 있으나 발굴되지 못하고 있을 수 도 있다.

 

확실하게 문헌으로 ‘다전(茶田)’의 이름이 보인 것은 다잠유고(茶岑遺稿)이다. 다잠의 아버지인 양식(梁植)은 그 호를 ‘다전(茶田)’이라 했다. 실제 사는 지역을 호로 삼는 경우가 많다. 또 지역 명칭은 지역 특성을 따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의 아들인 덕환(德煥 : 1846-1919)까지도 호를 다잠(茶岑)이라 하고 다잠정사(茶岑精舍)를 지었다. 다잠정사운(茶岑精舍韻)을 딴 시를 보면 차밭이 있다는 것이 확실히 나온다.

 

양식(梁植)은 제주양씨 병사공파(兵使公派)로 전라도병마절도사 양우급(梁禹及)의 7대손이다. 양우급은 중종 때 이조판서로 추증된 교리(校理) 혜강공(惠康公)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1488.9.19~1545.8.18]의 5대손이다.

 

다잠의 손자인 송파(松坡) 양천승(梁千承 : 1913~ )은 그의 송파수상록(松坡隨想錄)에서 학포의 제5자인 양응덕(梁應德)이 보성에 터를 잡았다한다. 보성군에서 텃골과 가신굴에 양씨가 정착한 1543년과 비슷한 연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박실에 당시 양응덕의 아들 양산항이 살았음을 증명해주는 것은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이다.

 

「(1597년 8월 11일) 맑다. 아침에 (박곡의) 양산원의 집으로 옮기다.(초고 - (초고) 이 집 주인은 벌써 곡식을 가득 싣고 바다에 떴다고 한다)- 송희립(宋希立)과 최대성(崔大晟 : 1553.3.7~1598.6.8)이 와 보다.」

 

득량(得糧)의 이름을 얻었다는 말대로 양산항은 군량미를 대고 있음이 나타나 있다. 이순신 장군은 양산항의 집에서 3일간 유숙하면서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리고 떠난다.

 

차밭밑은 현재 문화마을로 지정되어 도로 포장 등이 잘 되어 있다. 차밭밑 에 들어서면 조그마한 방죽이 있고 최근에 세운 오매정(五梅亭)이란 정자가 있다. 그 방죽 안 집에 다잠정사가 있다. 어렸을 적 방죽에 늙은 소나무가 있어 밤이면 참 무서웠는 데 그 소나무가 지금은 없다. 늙어 죽어 베어버렸다 한다. 지금 보니 더 무서운 것은 어릴 적 아무렇지도 않는 소나무가 늙어 죽었다는 ‘세월’이다.

 

그런데 차밭밑 마을 산기슭엔 차가 아직도 무성하다. 사실 차이름만 차밭밑으로 남아 있었고 차를 아는 주민마저 없었다. 어린 내가 차를 보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차를 알고 마신 지가 4반세기가 넘었는데 타향살이로 고향을 떠나 있었다. 내가 자란 마을 차밭밑의 찻잎 한번 못 보고 지낸 것이 매우 아쉬웠다. 다만 차와 인연을 맺고 다전부락에서 자란 상황에 다전(茶田)이라는 자호(自號)를 즐겨 씀은 차밭밑이 마음속에 지금까지 여여(如如)하게 남아 있음인 지도 모른다.

 

목포대 국제차문화연구소 정서경 씨는 득량에서 야생 차나무가 자란 7 곳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삼정리의 쇠실과 성재동 등은 송곡리의 차밭밑과 그리 멀지 않는 곳이다. 정서경 씨가 차밭밑을 직접 조사하여 쓴 글을 그대로 인용하여 본다.

 

다전마을 입구의 오해정이라는 정자 앞에서 우회하면 다전회관이라는 황토색 벽돌건물이 있다. 왼쪽의 대가댁 전통가옥과 회관 사이 길로 쭉 올라가면 왼쪽으로 같은 모양의 은색 대문이 이어지며, 마지막 3번째 대문집이 양돈승 옹(80)댁이다.

 

본채 오른쪽의 곡간 뒤편에는 대표적인 굵은 천연차나무가 있고 뒤로 난 넓은 대숲 사이사이의 차밭 일대에 이런 굵은 차나무는 몇 그루 더 보였다. 물론 모두 교목 소엽종이다. 대밭 속의 바위 밑에 있는 이 묵은 차나무의 수령은 2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나무높이는 2m 50㎝, 땅에서 나온 가장 굵은 부분이 직경 11㎝, 찻잎이 나 있는 형태는 4매로 2㎝ 마디마다 찻잎이 나 있었다. 찻잎의 길이는 가장 긴 것이 14㎝이고 작은 것은 4㎝, 다 큰 잎은 평균 10㎝ 내외며, 폭은 대체로 3.5㎝의 약간 긴 찻잎의 형태였다. 톱니바퀴 수는 30~34개였다.

 

잎 면은 안으로 오목하고 가장자리는 밑으로 살짝 처졌다. 잎 끝은 가늘게 뽑아지면서 뾰족했으며 끝부분이 살짝 감아진 느낌의 좁고 긴 타원형이었다. 잎 색은 진한 녹색을 띄면서 광택이 있다.

 

차나무의 몸매는 굵은 팔뚝에서 뻗어 나온 아주 후리후리하게 잘생긴 매끈한 대여섯 가닥 정도가 나 있고, 바위 속 뿌리부분에서 서너 가닥의 매끈한 가지가 나 있는 굵은 몸매의 성긴 다발이 땅으로 꺾어지다 곧추선 모습으로 서 있다. 표면의 색깔은 백색에 가까운 갈색으로 반들거림도 없었고 껍질의 터짐도 보이지 않았다.

 

남향의 차밭으로 동해와 병해에는 강한 생육상태를 보였다. 차밭의 경사 정도는 42°. 대나무가 많고 오전에는 양지바른 곳이지만 오후 3시쯤이면 해가 넘어가는 위치여서 해가림은 많이 된 상태였다. 쭉쭉 뻗은 대나무 사이에서 자라고 있어 해가림도 많이 되어 볕이 드는 각도는 70° 정도였다.

 

차나무에는 아직도 피었던 차꽃이 떨어지지 않고 남아 말라가며 향을 남기고 있고 남동향인 산의 앉음새대로 마을이 들어서 북풍을 막아 차나무의 생육에는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집을 둘러싼 전체가 죽로차밭이었다. 박실마을은 따뜻한 골짜기 마을로 차가 잘 자랄 그야말로 차마을인 곳이다. 다전동은 보성읍과 기러기재의 동남쪽으로 자리해 기후가 보성보다 상당히 따뜻한 편에 속한다.

 

이 묵은 차나무 외에도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바위사이에 굵은 차나무 몇 그루가 더 있어 옛 차나무 밭으로 잘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차밭 면적은 총 역 ㄴ자 형으로 상하좌우 사방 3m정도였다. 흙은 약간 검은색을 띠어 좋아 보이고 경작지가 아니어서 인산과 미량요소 유기물이 부족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다음은 글쓴이가 발견한 차밭밑의 차나무다. 지난 2006년 선친과 함께 아버지가 말씀하신 그 방죽 안집 뒤안에 갔을 때 대숲에 무성한 차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아래 사진은 2006년 추석에 차밭밑에서 글쓴이가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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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 보아주지도 않고 가꾸지도 않는데 대밭에서 꿋꿋하게 자라고 있었다. 차 상태도 기름지고 아주 좋아 보였다. 언제부터 저렇게 자라고 있었을까?

 

그러면 득량 차밭밑의 야생차는 품질은 과연 어떠할까? 다행히 차시험장의 연구와 시험이 있다. 차시험장에서는 우리 야생차의 우수품종을 고른 결과 11개체를 선발했다. 그 중에서 득량 차밭밑(1-04-04)의 야생차는 탄저병 등 병충해에 대한 저항이 강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형태적 특성도 좋다. 성분 함량도 좋다. 삽목 발근력도 좋아 대량 증식에도 좋다는 것이다.

 

차밭밑의 자생차는 우리 야생차 중에서도 가장 좋은 품종이라 한다. 이 좋은 품종이 널리 보급되어 우수한 품종으로 자리잡기 바란다. 이 다전 품종이 많은 다인을 건강케 하고 신령스럽게 하기를 기대해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라고 하는 화개 도심골 고차수(古茶樹)가 천년수(千年樹)라 하여 1,00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둘레가 64cm로 기록되고 있다. 순천대 김우영 교수가 발굴한 순천 송광면 이읍 차나무는 둘레가 46cm라 한다. 그는 천년 세월에 64cm이면, 46cm이면 몇 년의 세월인 지 궁금해 한다. 직경 10cm내외의 차나무는 주변에 많이 있다고 하였다.

 

차밭밑의 차나무도 10cm 내외의 차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읍 차나무와 비슷한 시대일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도 살폈듯 약 200년 전에는 거의 양씨들이 차밭밑에 살고 있을 때다. 또 차밭밑은 일찍부터 주민들이 살던 곳이라 이 야생 차밭도 오래 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연 언제부터 차밭이 있었는 지를 밝힐 수 있는 문헌이 발굴되기를 바란다.

 

 

5. 차밭밑의 차문화

 

차밭밑은 전형적인 양반촌이다. 상당히 부유했고 글쓴이가 어렸을 적만 해도 각 집에서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만석궁, 천석궁의 집도 있었고 어린 나이에 그 수 칸의 기와집들은 대궐 같이 보였다.

 

그 중에서도 양덕환의 장자이며 제 할머니의 큰아버지이기도 한 전은공(田隱公) 양회수(梁會水 : 1876~1958.2.13)집(1937년 건축)이 으뜸이었다. 그 후손이 쇠락했지만 지금도 옛집의 모습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차의 기록은 전은의 아버지 다잠 양덕환의 다잠유고에서 많이 나온다.

 

문명의 상징인 전기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박실에 들어올 정도였다 글쓴이가 보기에도 새마을운동으로 지붕개량을 할 때도 차밭밑은 거의 다 기와집이어서 지붕개량을 할 필요도 없었다. 양씨 일가는 자손들을 일제 말이나 해방 이후에도 서울, 광주 등에 유학을 보냈다. 법관, 교수, 교장, 면장 등이 유력인사가 많이 나온다. 그 이전부터 벼슬을 한 양반(兩班)으로 여유가 많았다.

 

이런 상황으로 일제시대에도 차문화에 접할 수 있었고 집 뒤에 야생 차밭이 있어 손쉽게 차를 마시지 않았나싶다. 선친의 말에 의하면 차밭밑의 일반 주민들에게 차는 감기가 들 때 끓여 뜨겁게 마시는 약이었다 한다.

 

삼국시대 때부터 차문화를 형성해 온 우리나라 차는 신하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중기 임진왜란 전까지 성하다가 거의 명맥이 끊기다시피 하였다. 송경섭씨가 조선전기 선비의 다시(茶詩)를 분석에 따르면 119명의 688수로 중국의 금, 원, 명, 청, 근대에 이르는 800여년간 중국의 다시(茶詩)가 500여수인 것에 비하면 상당한 양이라 한다. 대부분이 중국 사신이나 차와 관련된 관료가 100여명(84%) 537수(78%)이고 명문거족(名門巨族)도 6명으로 무려 118수를 남기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활발한 차문화가 임진왜란 이후 실로 2백년이나 기록에서 사라졌던 차가 19세기 초 다산(茶山), 초의(艸衣), 추사(秋史) 같은 다인에 의해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1940년 경 일본인인 가입(家入)이 전남지방의 전다(錢茶) 등을 조사한 책인 ‘조선의 차와 선’(번역본은 동명여중교장 최순자 씨의 초안을 최계원 광주시립박물관장과 글쓴이의 교주(校註)로 1983년 발행)등 일본인에 의한 기록 이 있을 뿐 별다른 기록이 없던 차에 전남 보성 차밭밑에 문인차(文人茶)를 엿볼 수 있는 귀한 기록이 있다.

 

증조부와 관련된 시문이 실려 있다고 건네받은 다잠유고(茶岑遺稿)를 보니 다잠정사(茶岑精舍)를 시인문객 들이 서로 교류를 하면서 차를 마시는 내용의 시가 있었다.

 

다잠(茶岑) 양덕환(梁德煥)(1846-1919)은 칠순(1916년경)에 다잠정사를 짓고 시인문객과 교유하였다. 다잠정사 집 뒤엔 야생차가 대나무 사이에서 자라고 있었다. 차밭과 그 마을을 다잠(茶岑) 다산(茶山) 다전하(茶田) (茶田下) 등으로 불렀다.

 

1976년 발간된 다잠유고(茶岑遺稿)는 전은유고(田隱遺稿)와 송담유고(松潭遺稿)와 합본인데 전은(田隱)과 송담(松潭)은 다잠의 첫째와 셋째 아들이다. 전은 양회수(梁會水)는 홍승(洪承) 백승(百承) 두승(豆承) 지승(智承)의 네 아들을 두었고 송담 양회전(梁會沺)은 만승(萬承) 천승(千承) 유승(瑬承)의 세 아들을 두었다.

 

다잠유고의 편집인은 송담의 장자(長子) 만승(萬承)이고 발행인은 전은의 현손(玄孫) 창열(昌烈)이다. 그리고 다잠의 둘째인 양회선(梁會宣)은 낙승(洛承) 길승(吉承) 봉승(鳳承) 완승(完承) 별승(別承) 근승(近承) 등 6남과 2녀를 두었다. 장녀인 승남(承男)은 바로 글쓴이의 할머니이다.

 

또한 효자로도 이름난 ‘전은’(차밭밑 마을 입구에는 ‘전은’의 효자비가 있다)은 필자의 증조부인 담은(澹隱) 조병진(曺秉鎭)과 교유하여 담은정운(澹隱亭韻)의 화답시와 담은정팔경시(澹隱亭八景詩)의 차운을 남긴다. 또 담은은 전은의 회갑연에 차운을 남긴다.

 

저의 증조부도 차가 나는 마을인 차밭밑에서 며느리를 들이고 전은공과 교류가 있던 것으로 보아서 차생활을 한 다인이 아니었을까? 「담은시집(澹隱詩集)」115수를 살펴보았지만 다시(茶詩)는 찾지 못했다. 다만 ‘스님은 화로에 약 다리니 푸른 연기 오른다(僧爐煎藥紫生烟)’는 구절이 차와 관련된 것 같다. 실제 약일 수도 있고 차밭밑의 예에서 보듯이 차를 약으로 썼으니 차일 수도 있겠다. 여연(如然) 스님도 이 얘기를 듣고 “약”이 아마 “차”일 것으로 말해 주었다.

 

그런데 저의 증조부 담은공이 실제 차를 마셨음을 직접적으로 알려 주는 문헌 자료가 나왔다. 89명의 시인들이 저의 증조부의 시를 화답하는 것을 모은 시집 「담은정시집(澹隱亭詩集)」에서다. 89인중 40번째 석남 임옥현(石南 任玉鉉)은 담은의 생활을 이렇게 묘사한다. “(담은공이)상에서 그림을 그리고 『화로에서 차를 다리고』 조용히 책을 검열하니 이미 날이 저문 줄 모른다.”

 

여기『‘팽다일로’(烹茶一爐 : 화로에서 차를 다리고) 네 글자』 고고학자가 천 번의 입맞춤(붓질)로 문화재 한 점을 발굴한다고 들려주는 여연 스님의 얘기처럼 내겐 천금보다 값진 글귀였다. 명확히 저의 증조부의 차 생활을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하여 저의 증조부 담은 조병진도 다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저의 증조부는 직접 차 생활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요즈음 다인은 스스로 드러내기 바쁘다. 하지만 ‘담은(澹隱)’ 그 호()의 뜻처럼 ‘담담히 숨었다’. 그렇지만 오히려 옆 사람이 더욱 더 드러내어 다인임을 밝혀 주고 있다. 유달리 글쓴이가 차를 좋아하는 것도 혹 이런 집안 내력과도 무관하지 않는 지도 모른다.

 

이곳 차밭밑에서 차 생활이 있었고 이 영향을 받아 담은도 차밭밑과 멀지 않은 율어에서 차 생활을 하였다 여겨진다. 그러나 담은은 가세가 점점 기울어 물고기 하나도 마음대로 사지 못할 형편이었다. 가난하여 차 생활을 마음껏 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다잠(茶岑)의 다음 다잠정사운(茶岑精舍韻)을 보면 다잠 자신은 차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다잠정사운 茶岑精舍韻

 

칠순에 다행히 운 있어 七旬幸運築斯樓

이 정사 지으니

 

맑고 한가로움 얻어 占得淸閑永日遊

긴 나날 노닌다.

 

땅은 으슥하고 깊어 地僻爲嫌開洞口

마을 어귀 열기 꺼리고

 

난간 머리위엔 月明尤喜上欄頭

달 밝아 더 기뻐라.

 

새 이엉도 다 못 얹어 茅茨未畢難經夏

여름 지나기 어렵고

 

토목공사 겨우 하는데 土木纔成已屬秋

이미 가을 왔구나

 

마음가짐과 지킴 戒爾持心同此柱

이 기둥같이 하고

 

대대로 집안 이름 드날려 家聲世世好風流

좋은 가풍 흐른다.

 

전원생활을 즐기는 선비의 풍류(風流)가 잘 나타나있다. 다잠(茶岑). 자신의 호에 차 다()를 넣을 만큼 차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나타냈다. 그래서 죽산(竹山) 안규문(安圭文)은 이렇게 노래한다. “차 끓이는 소리 일년 내내 끊이니 않으니 차를 호로 삼음이 어찌 우연이랴?”(松風不斷四時秋 茶之揭號豈誠偶) 여기서 다잠(茶岑)이 다인이기에 차 다()자를 써서 호로 삼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정약용이 해남 귤동의 뒷산 ‘다산’의 이름을 따서 ‘다산(茶山)’이라는 호로 삼음과 닮은꼴이다. 차밭밑 위의 차밭도 귤동처럼 다산(茶山)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는 전은유고나 다잠유고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다.

 

담은이 그렇듯 직접 차 생활을 합네 하고 읊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차 생활은 외려 더 도드라진다. 다른 시인들이 앞 다퉈 노래한 까닭이다. 안규문은 “차 끓이는 소리[松風] 끊이지 않는다”(松風不斷)한다. 그것도 일년 내내(四時秋). 죽탄(竹灘) 황재묵(黃在黙)은 “세 때 차를 마시고”(三時煎供)라 한다. 그야말로 ‘밥 먹듯’ 다반사(茶飯事)로 차를 마셨음을 알 수 있다. 또 “차 화롯가에서 세월을 보낸다”(爐邊消歲月)하니 만년 세월을 차와 함께 즐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잠은 차를 무척 즐기었던 다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신은 드러내지 않아 더욱 더 빛난다.

 

다잠정사의 교유하던 문인들의 차생활은 10개의 차운 중 3번째로 쓴 옥전(玉田) 안규신(安圭臣)의 시 전문을 보자

차밭아래 누각엔 茶烟細起篆山樓

차 연기 가늘게 오르고

 

평지에 사는 신선 平地神仙課日遊

하루 일과는 노는 일이네

 

소동파 석가산 나무는 蘇門木假三峰頂

삼봉 정상에 있고

 

노동의 맑은 바람은 盧氏淸風七碗頭

일곱 찻잔 머리에 이네

 

벗과 바둑을 두며 碁朋對局同消夏

같이 여름을 지내고

 

서재에서 연려실기술을 보고 書室燃藜獨送秋

홀로 가을을 보낸다.

 

선조의 충성과 공훈은 先世忠勳來世慶

자손의 기쁨이요

 

네모진 연못에 출렁이는 물은 方塘活水有源流

흘러나오는 곳이 있다.

 

소동파(蘇東坡)의 석가산 나무가 삼봉에 있다와 노동 칠완은 서로 대구다. 소동파는 당송 팔대가의 한사람인 대문장가요 노동은 유명한 다인이다. 석가산(石假山)은 돌로 쌓은 가짜 산으로 중국의 정원양식 중에 하나다. 주로 세봉우리를 만들었으며 연못 한가운데 섬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노동 칠완은 당나라 시인 옥천자가 맹간의로부터 차를 받고 지은 칠완의 시를 가리킨다. 칠완(七碗)은 일곱 찻잔인데 차 마시는 일의 대명사로도 쓰인다.

 

노동의 7완다가(七碗茶歌)를 한 번 보자.

 

일곱 잔의 차노래[七碗茶歌]

첫째 잔은 목구멍과 입술 적시고 一碗喉吻潤

 

둘째 잔은 외로운 번민 씻어주네 兩碗破孤悶

셋째 잔은 메마른 창자 찾나니 三碗搜枯腸

생각나는 글자가 오천권이나 되고 惟有文字五千卷

 

넷째 잔은 가벼운 땀 솟아 四碗發輕汗

 

평생의 불평 모두 털구멍으로 흩어진다. 平生不平事 盡向毛孔散

 

다섯째 잔은 기골이 맑아지고 五碗肌骨淸

 

여섯 잔 만에 선령과 통하였다 六碗通仙靈

 

일곱째 잔은 채 마시지도 않았건만 七碗喫不得

 

느끼노니 두 겨드랑이에 唯覺兩腋習習淸風生

맑은 바람이 솔솔 일어난다.

 

안규신은 위 노동 7완의 노래를 ‘노씨의 맑은 바람’[盧氏淸風]이라 한다. 여기 다잠정사에 모인 안규신을 비롯한 다인들의 풍류는 결코 노씨에 뒤지지 않는다. 번뇌를 떨치니 신선의 경지까지 이르고자 한다.

 

4번째 차운으로 쓴 안규문(安圭文)의 시에서도

 

칠완 잠시 쉬고 번뇌 떨쳐내니 七碗纔休塵念掃

봉래 신선과 함께 하는 것 같네 蓬萊仙伴卽其流

 

라고 하여 ‘칠완’ 자체가 ‘차마시는 일’로 쓰임을 보여준다. 봉래 신선은 유가(儒家)를 넘어 도가적(道家的)인 취향을 보여 준다.

 

7번째 차운인 죽탄(竹灘) 황재묵(黃在默)의 시를 보자. 누각 주위에 차나무가 있었고 차를 세 때 올려 마신다고 한다. 차를 마시는 일이 상당히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한 작은 누각에 嘉木叢叢一小樓

아름다운 차나무는 빽빽하고

 

주인과 손님 함께 어울려 主賓結社足優遊

즐겁게 노닌다.

 

반평생 맑게 닦아 半世淸修宜白面

벼슬없이 지내고

 

세 때 차를 다려 三時煎供走蒼頭

올려 마시곤 한다.

 

붉게 달아오른 화롯가에서 紫汞爐邊消歲月

세월을 보내고

 

국화 피온 책상머리에서 黃花案上講春秋

춘추를 가르친다.

 

맑은 멋스러움 如何分得淸風味

어찌 나눠 가지리?

 

그대와 나 사이 숨어 흐르니 也與君吾作隱流

 

위의 시에서는 풍류(風流) 자체를 이야기하고 있다. 차를 마시며 화롯가에서 세월을 보내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산다. 맑은 멋스러움, 오붓한 재미는 숨어 흐르는 그대와 나 사이의 은밀한 은류(隱流).

 

가목(嘉木)’은 차나무의 다른 이름이다. 조선 후기 차인으로 유명한 초의선사는 우리 차를 노래한 ‘동다송(東茶頌)’의 제1송에서 ‘후황이 아름다운 나무를 귤의 덕과 짝 지으시니’(后皇嘉樹配橘德)라고 하고 있다. 아마도 여기 ‘가수(嘉樹)’를 ‘가목(嘉木)’으로 했다 여겨진다. 그들이 동다송 정도는 기본으로 알고 있었지 않았을까?

교유하는 그들 스스로를 다선(茶仙)이라고까지 했다. 6번째 차운에서 정의현(鄭宜鉉)은

 

속세에서 벗어난 높은 누각에 高出人間第一樓

다선들이 이따금 서로 좋아 노닌다. 茶仙往往好相遊

 

라고 노래한다.

 

죽탄의 시에서 ‘작은 누각에 차나무가 빽빽하다’(嘉木叢叢一小樓)고 한다. 8번째 차운을 쓴 선병훈(宣炳勳)은 ‘한 누각 밭에 차꽃이 가득하다’(滿圃花花一草樓)한다. 다잠은 집 뒤쪽 야산인 차 언덕뿐만 아니라 다잠정사 주변에도 차를 심어 차밭을 만들었던 것 같다. 구기자, 국화를 친히 심고[정의현은 친재기국(親裁杞菊)이라 함] 약초까지 심었다.

 

다잠정사운에 차운을 한 10인 중, 안규신, 안규문, 정의현, 황재묵 등은 직접 차생활을 노래하고 있다. 이들 다인들은 스스로 다선(茶仙)이라고까지 하면서 차풍류를 즐겼다. 보성, 차밭밑을 중심으로. 그게 불과 90여년전의 일이다. 당시 차밭밑의 선비들은 활발하게 차문화를 향유하였다. 주변에 차가 있고, 여유가 있고, 차를 좋아하는 다인들이 한시를 주고받으며 오갔다.

 

그러나 갑자기 그런 문화는 끊기었다. 가장 큰 사건이 6.25전쟁이 아니었을까? 조선의 차가 임진왜란으로 갑자기 끊기듯. 지금은 다잠정사 정원에 조성했다는 차밭은 없고 차를 마시는 풍속도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차 지명과 뒷산에 야생 차밭은 그대로 푸르다.

 

6. 결(結) : 차밭밑 차문화 발굴의 의의

우리 차문화는 널리 알려진 몇몇 다인들과 그 행적에 치중되어 있다. 지역도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본 고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단지 차 지명으로만 주목을 받는, 보성의 자그마한 마을, 차밭밑의 역사와 차문화를 살펴보았다.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조선 후기에는 차문화의 명맥이 거의 끊긴다. 다만 사원을 중심으로 사원차(寺院茶)가 이어 온 것으로 본다. 그러나 반가(班家)를 중심으로 선비들의 문인차(文人茶)도 상당할 것이다. 그것도 차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차산지(茶産地)를 중심으로. 본 고가 그 가능성을 충분히 제시하고 있다.

 

시어(詩語)들의 선택을 보면 차밭밑의 다인들은 이미 상당한 경지다. 동다송을 아는 것은 물론, 송풍성(松風聲)과 노동칠완(盧仝七碗)을 노래한다. 그들은 이미 차에 대한 고전과 역사 등을 알고 있다. 주위에 차가 있고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갖추고 차와 풍류를 즐긴다.

 

이런 여건을 갖춘 곳은 차가 나는 남도 각 지역에 산재하리라 생각된다. 차밭밑의 차문화가 꽃 피웠듯 비슷한 여건의 다른 지역도 유사한 차문화가 있지 않았을까? 지금처럼 차가 산업화되지 않는 당시는 우선 차를 쉽게 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차산지 근처에 살 필요가 있다. 재배차가 적고 야생차가 주종이다. 그리고 야생차가 나는 곳은 차()자가 들어간 땅이름을 갖는 경우가 흔하다.

 

우선 남도 지역의 차 지명이 들어간 곳을 보면 글쓴이가 파악한 곳만도 15여 곳에 이른다. 실제 정밀하게 조사하면 훨씬 많을 것이다. 또 차이름을 얻지 못한 야생차밭도 많을 것이다. 특히 보성은 자생차의 메카로 이런 자생차가 산지가 101곳에 달한다. 그리고 예향(藝鄕)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글쓴이 증조의 문집만 보아도 ‘담은정시집’엔 모두 90명의 시인과 문인들이 시문을 주고 받는다. 따라서 ‘다잠유고’에서 보듯 보성지역에 차문화가 꽃피웠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아직 밝혀지지 않는 다인과 차문화가 많이 있을 수 있으나 문헌조사와 연구가 아쉽다. 물론 자생차가 있다고 반드시 다인과 차문화가 있다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연과 환경은 반드시 그 인물을 키우고 문화가 발달하리라 본다. 보성은 의향(義鄕)과 더불어 문화 예술을 사랑하고 강남의 문화(시문학)가 꽃피운 곳이기에 더욱 더 그렇다.

 

차산지 등의 차문화가 있었더라도 문헌 자료 등 미비로 밝혀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본 고에서 차문화와 다인들을 그들의 개인 문집에서 찾았듯 차산지를 중심으로 한 선비들의 개인 문집이나 시집 등을 조사하면 얼마든지 추가로 발굴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 한문으로된 우리 유산은 끊길 위기다. 일제 시대까지 이어지던 한시의 전통도 거의 사라지고 있다. 함께 일제 때까지도 면면히 이어진 유가(儒家) 선비들의 차문화, 차시 그리고 함께한 풍류도 함께 없어지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보성, 차밭밑 선비들의 차문화를 드러냄은 그 자체의 발굴에 1차적 의의가 있다. 더불어 이와 비슷한 환경을 가진 다른 많은 곳의 가능성을 여는 데에도 의의가 있다. 이를 계기로 어쩌면 우리가 정말 모르고 과소 평가할 수도 있는, 조선 후기에서 일제 시대까지의 문인차(文人茶)의 큰 바다의 지평을 열 수도 있다. 끝.

 

 

 

 

[참고문헌]

 

조석현 역, 조병진, 담은시집(2007)

조석현 역, 조병진, 담은정시집(2009)

조병진, 창녕조씨세기

양만승 편집, 다잠유고(1976)

양만승 편집, 전은유고(1976)

양만승 편집, 송담유고(1976)

양천승, 송파수상록(1998)

박봉양, 호남여수읍지(1985)

김우영, 순천 자생차와 순천지역 차문화에 대한 고찰

보성군 홈페이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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