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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밭밑 양다암(梁茶庵)의 차생활
조석현, 2010.7
1. 차밭밑 ..................................................... 1
2. 양다암(梁茶庵) ........................................ 2
3. 다암시고(茶庵詩稿) ................................. 3
4. 다암의 차시 - ‘차밭밑차 끓이기’ ............... 4
5. 차밭밑차 만들기 ....................................... 6
6. 차밭밑차 끓여 마시기 ............................... 8
7. 차밭밑 차문화를 발굴하면서 ...................... 9
1. 차밭밑
전남 보성에 있는 다전(茶田)부락을 그 지역 사람들은 '차밭밑'이라 부른다. 전남은 국내 야생차 305개소 중 235개소가 있어 77%를 차지하고 있다. 또 보성은 전남의 43%인 101곳에 야생차가 있다. 전남 보성은 실로 한국야생차의 ‘메카’라 아니할 수 없다. 차의 고향, 보성에서 다전(茶田 : 차밭밑)은 특히 그 지명으로 주목을 끌고 있으나 이에 대한 연구는 미진하다.
다행히 필자는 오래전부터 차밭밑의 다잠(茶岑) 양덕환(梁德煥 : 1846-1919)이 쓴 ‘다잠유고’를 받아 가지고 있었다. 다잠유고를 보면 ‘다잠정사운(茶岑精舍韻)’의 차운으로 쓴 옥전(玉田) 안규신(安圭臣), 죽탄(竹灘) 황재묵(黃在黙), 죽산(竹山) 안규문(安圭文), 정의현(鄭宜鉉) 등 4인은 ‘다잠’의 차생활을 읊고 있다. 이 부분은 졸저 ‘보성, 차밭밑의 차문화’에서 자세히 다뤘다. 여기에서는 ‘다암(茶庵) 양순(梁栒)’ 공이 직접 자신의 차생활을 읊은 차시를 중심으로 살피려 한다.
차밭밑은 크게는 박실의 한 부분이라 ‘작은박실’, ‘아랫박실’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차밭밑 사람들은 원박실을 ‘웃첨’이라 부르며 스스로 ‘차밭밑’을 자랑스럽게 박실과 분리하여 부른다. 행정구역상으로 다전부락은 1946년 행정구역이 분할되어 독립했다. 그러나 일찍이 양식(梁植 : 1815~1873)은 그 호를 ‘다전(茶田)’이라 불렀다. 여기서 자세히 다루려한 ‘다암공’은 곧 ‘다전공’ 양식의 친동생이고 ‘다잠공’의 작은 아버지이다.
양식의 아들 다잠이 쓴 ‘다잠유고’에는 차밭밑을 ‘다잠(茶岑)’ ‘다전하(茶田下)’라 부르고 있다. 양회운(梁會運), 양회철(梁會喆), 양천승(梁千承), 조정립(趙禎立) 등은 정약용이 유배지 귤동 뒷산을 다산(茶山)이라 부르듯 ‘다산(茶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도 이 차밭밑에는 야생차가 있다. 목포대 국제차문화연구소 정서경씨가 2009년에 이곳 차밭밑을 조사한 기록이 있다. 필자도 2006년 다암공의 집 뒤안 대밭에서 야생차가 자란 것을 보았다. 보성 차시험장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득량 차밭밑의 야생차(1-04-04)는 탄저병 등 병충해에 강한 것으로 밝혀졌다. 형태 특성, 성분 함량, 삽목 발근력도 좋아 대량 증식에 유리하다고 판명하였다. 이 우수한 다전품종의 보급과 그의 역사, 문화도 함께 보급되기를 기대해 본다.
2. 양다암(梁茶庵)
양다암의 생애는 그가 직접 남긴 ‘다암시고(茶庵詩稿)’의 서문에 간략하게 나와 있다. 호는 다암(茶庵), 자는 자경(子罄)이고 이름은 순(栒)이다. 순조 20년 1822년 5월 21일 다전에서 태어나고 1886년 7월 19일 다전에서 서거한다.
보성군에서는 보성 박실에 양씨가 정착한 것은 1543년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능성(현 전남 화순군 능주)에 살던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 1488.9.19~1545.8.13)의 제5자인 양응덕(梁應德)이 보성으로 와서 터를 잡았다는 족보의 기록과 일치한다.
양응덕의 아들은 영해도호부사(寧海都護府使) 양산항(梁山杭)이고 이 양산항의 손자가 제주양씨 병사공파(兵使公派)의 시조인 전라도병마절도사 양우급(梁禹及)이다. 다암 양식은 양우급의 7대손이다. 또 그는 생부는 의호(義浩)이고 대를 잇기 위해 중부 윤호(潤浩)에게 양자로 갔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다전(茶田) 양식(梁植)은 그의 친형이다.
다전의 4남 다잠(茶岑) 양덕환(梁德煥)이 ‘다잠정사’를 짓고 차생활을 한 다인이었음을 볼 때 다암이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40여년을 차를 마시는 작은 아버지와 다전이라는 한 동네에서 같이 살았는데 어찌 교류가 없었고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세 사람이 다전(茶田), 다암(茶庵), 다잠(茶岑) 등 차 다(茶)자를 호로 삼음이 우연이 아니리라.
지금도 양식과 양다암의 후손들이 다전에 살고 있다. 무려 500여년 가까이 다전이라는 한동네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다전은 지금도 양씨들의 자작일촌(自作一村)이다.
다암은 늠름한 자태에 일찍이 가훈을 몸소 실천하여 효행과 우애가 있는 군자였다한다. 시, 서, 경전을 애독하여 장구를 터득하지 못한 것이 없는 선비의 규범을 보였다. 더욱 시를 공부함에 풍월을 읊고 감상했다. 벗을 보낼 때는 반드시 시를 쓰고 읊었다. 선조의 문헌을 광범위하게 살펴 육첩(六帖)을 지어 전하고 병사(兵使) 구성(龜城)의 실기(實記)를 편찬했다. 시문을 지은 것이 많지 않음이 없지만 다 흩어져 없어지고 다만 남은 것이 4백여수라 한다. 그 남은 시고가 ‘다암시고’이다.
3. 다암시고(茶庵詩稿)
‘다암시고’는 손자 화승(禾承)에 전해졌으나 계축년(1973년) 가을에 서거하고 그 장자 동현(東炫)에게 전해지나 인쇄본(계축본)을 편찬하지 못하고 차자 동섭(東燮)이 편찬하게 된다. 그러나 상하로 구성되어 인쇄된 계축본은 원본 경술본과는 편찬 순서가 전혀 일치하지 않고 있다. 다만 ‘다암공묘표’(茶庵公墓表)가 실려 다암공의 선조와 다암공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고 발문에서 다암공의 면모를 수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필사본으로 ‘백련집(白蓮集)’으로 표시된 ‘다암시고’도 있었다. 이 역시 편찬 순서는 전혀 원본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본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다암시고’의 필사본이 더 존재하리라 본다.
‘다암시고’ 원본은 경술년(1850년) 1월에 편찬한 것으로 되어 있다. 표지안 목차에는 ‘양다암시고목록’이라 하고 있고 목록이 끝나고 본문이 시작될 때도 ‘양다암시고’라 되어 있다. 특히 경술본이 저자 자신이 쓴 원본이라 여겨지는 것은 본문을 시작하면서 자신을 직접 소개한 글이다. “나는 조선 순조대왕 20년 임오(1822년) 5월 21일 다전에서 태어났다(我 朝純祖大王 二十年 ~ 生于茶田)”로 적고 있다.
이 원본은 동현의 외아들, 다암의 5대 종손 양기열(梁基烈)이 보관했다 빛을 보게 되었다. 5언절구 86수, 5언율시 48수, 7언절구 139수, 7언율시 121수 등 총 394수가 수록되어 있다. 다암시고는 다암이 29세의 젊은 나이에 쓴 것으로 차시 ‘자다(煮茶)’는 5언율시 48수 중 36수(13페이지)에 있다.
4. 다암의 차시 - ‘차밭밑차 끓이기’
우선 차시 전체를 감상해 보자
차밭밑차 끓이기
아홉 번 찌고 말려
신선대에 오래 두고
화로 끌어 석탄 때고
물 길러 오지병 연다.
연기 그친 우왕의 솥
눈 쓸어간 도잠의 잔
찻물은 옳고 그름 아니
붉은 회초리의 옛 전통
蒸曝九重回(증구구중회)
久藏仙子坮(구장선자대)
引爐石炭爇(인로석탄설)
汲水金罌開(급수금앵개)
烟歇禹儞鑵(연헐우이관)
雪消陶穀盃(설소도곡배)
瓊漿知是否(경정지시부)
遺制赭鞭來(유제자편래)
‘차밭밑차’에 대한 기록은 다암의 조카인 다잠공이 남긴 ‘다잠유고’ 등에서 발견된다. ‘다잠정사의 차운’을 통해 간접적으로 차생활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이 시는 차생활 자체와 차의 제법, 다기 등 다사(茶事)를 직접 노래한 시다. 1850년대 차밭밑의 차생활을 알게 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다암은 당대 차인인 초의, 추사보다 38년 뒤에 태어나니 1세대의 차이일 뿐 거의 동시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암도 그들을 알고 교류가 있었을까? 이 작은 한 편의 시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바로 후대인 다잠의 다잠유고에 나오는 다인 황재묵은 차를 ‘가목(嘉木)’이라 쓴다. 동다송의 ‘가수(嘉樹)’의 다른 표현으로 볼 때 ‘동다송’을 알고 있었다 여겨진다. 또 ‘칠완(七碗)’이나 ‘송풍성(松風聲)’ 을 이야기하는 것을 볼 때 차밭밑의 문인들이 차에 대한 조예가 깊음을 알 수 있다.
다암의 차시도 차의 제법, 차생활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다도의 옛 전통을 따라 엄격하게 다도를 지키려는 것을 볼 때 선대의 다인과 그 문화를 잘 알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5. 차밭밑차 만들기
당시 민간에서 마시던 차는 ‘잭살차[雀舌茶]’라 부르는 ‘일쇄차(日曬茶)’가 주였던 것 같다. 하동지방을 비롯 남부지방에서 발견되고 있다.
잭살차는 감기 걸릴 때 푹 끓여 마시던 ‘고뿔차’였다. 쇤 찻잎을 따 말려 삶아 먹으니 맛이 떫고 쓴 것은 당연하다. 약으로 먹었다. 어린 잎으로 만든 녹차보다 약 효과가 강할 수 밖에 없다. 차밭밑의 차도 선친의 말씀에 의하면 고뿔차로 마셨다 한다.
고뿔차는 차의 대가라 하는 초의가 내치던 바로 그 차다. 초의 52세(1837년)에 동다송을 지으면서 43세(1828년)때 칠불암에서 보았던 것을 이렇게 적고 있다. ‘ ① 늘 늦은 쇤 찻잎을 따 ② 땔나무인 양 햇볕에 말려 ③ 나물국 끓이듯 삶으니 ④ 빛이 붉고 진하고 흐리고 ⑤ 맛이 많이 쓰고 떫다 ’
실제 ‘햇볕차’는 ②의 햇볕에 말리는 것이 중요한 바, 햇볕에 널어 시들린 잎을 비빈 다음 다시 햇볕에 바짝 말린다. 이때 건조가 되면서 산화작용이 일어나고 그 산화작용으로 찻물 빛이 붉다. 민간에서 만드는 햇볕차는 솥에서 불로 익힌다든가, 증기로 찌는 인공적인 것이 없다. 오로지 자연 ‘햇볕’과 ‘바람’을 이용한다. 그래서 ‘하늘’이 도와줘야 차를 제대로 만들 수 있는 ‘하늘차’이다.
떡차는 ❶찌거나 ❷덖어서 성형하여 햇볕을 말리게 되니 제법에 따라 크게 ❶증쇄단차(蒸曬團茶)와 ❷배쇄단차(焙曬團茶)로 구별해 볼 수 있다.
다산과 초의는 ❷배쇄단차(焙曬團茶)로 만들었다. 다산은 1805년 4월 혜장에게 보낸 걸명시(乞茗詩)에서 ‘배쇄(焙曬)’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불에 익혀 햇볕에 말리는 절차는 반드시 방법에 맞게 따라 해야 나중에 차를 우렸을 때 빛깔이 해맑다’고 한다.
다산에게 차를 배운 초의도 떡차를 만드니 1858년(철종9) 초의의 선사(禪師), 완호대사(玩虎大師)의 삼여탑(三如塔) 비문 서문에 자하(紫霞) 신위(申偉)는 ‘초의가 ~ 4개의 차병(茶餠)을 보내왔는데 그가 손수 따서 만든 소위 보림백아(寶林白芽)이다’라 적고 있다.
그러나 전통의 민간에서 내려오는 제법은 ❶증쇄단차(蒸曬團茶)인 것 같다. 먼저 찻잎을 씻어 적당히 말린 뒤 시루에 넣고 찐다. 절구에서 곱게 찧는다.
틀 등에 넣고 모양을 만든다. 햇볕에 말린다. 꼬챙이로 구멍을 낸다. 화로에 걸어 불에 쬐어 말린다.
과 의 공정이 ‘찌고 햇볕에 말리는’, ‘증쇄(蒸曬)’의 공정을 보여준다. 의 공정에서 모양에 따라 떡모양의 떡차(餠茶), 둥근모양의 단차(團茶)로 불리우고 의 공정을 거치면 전차(錢茶)가 된다. 강진 무위사에서 시작되었다는 전차는 녹색곰팡이가 피어 청태전(靑苔錢)이라고도 불리웠다. 보성, 강진 등에서 1940년대까지 만들어졌다.
다암의 차는 어떤 차였을까? 형태의 언급이 없어 떡차임을 직접 증명해 주기 어렵지만 증포(蒸曝)의 내용으로 보아 ❶증쇄단차(蒸曬團茶)일 가능성이 크다. 전통의 ‘잭설차’는 증기로 찌는 과정이 없다. ‘오래둔다’는 구절도 후발효차(後發酵茶)인 떡차임을 보여준다.
다암은 첫 구절에서 ‘찌고 (햇볕에)말리기를 아홉 번 거듭해(蒸曝九重回)’라 쓰고 있다. ‘다경’의 ‘구증구포(九蒸九曝)’ 정도는 알고 있었으리라. ‘아홉 번 거듭한다’는 말은 꼭 아홉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라는 뜻으로 새김이 맞다 본다.
이유원(李裕元 : 1814-1888)은 ‘구증구포’의 제법을 정약용이 체득하여 절의 승려에게 가르쳐 강진 보림사에서 차를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다산 자신도 자신의 시에서 ‘차의 지나침을 줄이고자 다경의 구증구포를 쓴다’(洩過茶經九蒸曝)고 되어 있다.
6. 차밭밑차 끓여 마시기
먼저 화로에 석탄을 땐 것이 이채롭다. 석탄이 1930년대에 비로소 산업화된 것을 볼 때 1850년 당시는 매우 구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유함과 여유를 알 수 있다.
당시 다관으로 철제 오지병[금앵:金罌]을 쓴 것으로 보인다. 철주전자이다. 솥은 우왕의 솥이요, 잔은 도연명의 잔이라 부르고 있다. 다관은 우왕의 솥처럼 귀중하고 찻잔은 도연명의 술잔처럼 한가하다. 잔은 술잔을 그대로 찻잔으로 사용한 것이 아닌 지.
차의 풍류는 첫 구절에 선자대(仙子坮)와 도연명의 잔에서 잘 드러난다. 차를 보관하는 시렁을 선자대(仙子坮)로 나타냄으로써 ‘깨끗한 차를 오래 보관한다.’는 이미지와 다인을 은근히 신선에 빗대고 있다. 차를 끓여 마시는 시기는 추운 겨울, 눈이 쓸어갔고 차 연기는 그쳤다. 찻물은 붉디 붉다. 그래서 경장(瓊漿 : 붉은 옥같은 찻물)이라 한다. 홍차(紅茶)다.
다암은 어떤 다인이었을까? 대단히 엄격하게 다도(茶道)와 다사(茶事)를 지킨 다인이었다. 이윽고 차를 마실 때 먼저 찻물의 빛이 눈에 들어온다. 풍류의 달인이었던 다암이지만 차를 마심에 그냥 무심코 마시지 않는다. 차의 붉은 빛을 본다. 맑은 지 흐린 지 고운 지. 빛이 잘 나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잘못 만든 것이다. ‘찻물로 (제다의) 옳고 그름을 안다.’고 표현한다. 제대로 법제(法製)하지 않으면 빛이 다르다. 그래서 그 빛을 ‘붉은 회초리’라고까지 했다.
마지막 구절 ‘자편래’(赭鞭來 : 붉은 째찍이 온다)야말로 이 시의 시안(詩眼)이다. 표현도 독특하다. (잘못 만들었을 때는) 마실 때 (차빛깔이) 자신에게 채찍을 치는 것 같다. 다암은 차의 엄격한 다도와 예법을 따르는 다인이다. 풍류를 알고 차를 즐겼다. 단순히 마시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바로 뒷산의 차밭밑차를 따서 직접 전통적인 차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유제’(遺制 : 오랜 차 만들고 마시는 풍습)라 한다. 민가에서 떡차를 만드는 것은 오랜 전통이다. 다산, 초의 등에서 비롯되었다면 그리 표현할 수 없다. 또 차의 제법이 ‘초의’ 등의 ❷배쇄단차(焙曬團茶)가 아닌 전통적인 ❶증쇄단차(蒸曬團茶)임을 보여준다.
7. 차밭밑 차문화를 발굴하면서
다잠의 시인문객 중에는 다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잠정사에서 놀면서 스스로 다선(茶仙)이라 한다. 이렇게 차밭밑의 차문화는 다암이 일으키고 다잠에게서 꽃피웠으나 지금은 자취를 찾기 힘들다. 다인은 다암에 이어 다잠에게서 끝났다. 전은(다잠의 장자)이나 송담(다잠의 3자)에게서도 차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지금 차밭밑에는 야생차와 차이름 지명인 ‘다전’만 남아있다. 차밭밑에 사는 일부 후손들이 차 ‘다(茶)’를 사용한 호를 지어 부르고 있다.차 ‘다’자를 호로 붙이나 차를 알거나 차생활을 해서가 아니고 단지 사는 곳 ‘다전’의 지명을 딴 것이다.
필자는 차를 좋아하고 차밭밑에서 살았고 선조부터 대대로 외가 동네로 인연이 두터워 그 발자취를 더듬어 전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차밭밑의 차문화를 다시 일으킨다면 다행이다.
필자는 ‘보성, 차밭밑의 차문화’를 쓰면서 문집 등을 통해 보성, 차밭밑의 차문화가 더 밝혀지길 바랐다. 차의 지명이 있거나 차가 나는 산지인 남도지방, 보성 등지에 차에 대한 기록과 차의 문화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 예측했다. 이런 뜻을 전하자 벗은 내게 차밭밑의 차문화를 더 알 수 있는 ‘다암시고’를 보내주었다.
또 우리 문인차의 맥이 일제시대 뿐 아니라 조선후기도 끊기지 않았다 보았다. 다잠은 일제시대 차문화를 보여주었는데 이번에 발굴된 다암은 예측대로 초의시대 직후 조선 후기의 차문화를 보여주었다.
차밭밑만이 아니다. 보성 율어 오루굴에 은거하던 필자의 증조 담은(澹隱) 조병진(曺秉鎭 : 1877~1945)도 다인이었다. 차밭밑 다잠의 손녀를 며느리로 들이고 다잠의 아들 전은(田隱) 양회수(梁會水 : 1876~1958)와 교류했다.
차가 나는 남도지방 특히 야생차가 많은 전남과 보성지방에는 이외에도 민가의 차문화가 많았을 것으로 확신한다. 이를 확인 연구하는 방법으로 시문집 등 문헌이 더욱 더 연구되길 기대한다. 끝.
참고문헌
1. 다암시고(1850년), 양다암
2. 다암시고(1973년) 인쇄본
3. 백련집
4. 다잠유고,전은유고,송담유고(19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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